Positive51 2017. 1. 13. 20:38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를 읽고 독후감을 써본다.

 

본 독후감은 문학에 대한 조예와 소양이 전혀 없는

그냥 평범한 중년의 아저씨가 취미삼아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는 것입니다.

개인 기록물로서 보관하고자 하는 것이며

블로그를 통해 공개하는것은

어떠한 의견이나 비난도 참고하고 감수할 목적과 용의가 있기 때문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느낀 마음의 무게는

중학생때 누나가 선물로 준 톨스토이 인생론을 보았을때의

기분보다 조금 더 무거웠다.

솔직히 읽어도 무슨말인지 내용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책은 고등학생땐가 대학생 1학년이 되어서인가

아마 방학때 다시 읽으면서 내용의 상당부분을 이해하게 되었다.

지금도 이 책이 나에게 그럴까?

쉽게 말해 이 책은 내가 읽기에 나의 정신나이가 아직 어려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거나, 아니면 나의 인생살이로는

공통분모가 형성되는 부분이 별로 없어서이거나 둘중 하나일 것이다.

 

그래서 사실 독후감을 쓰면 안되지만,

그래도 지극히 나의 개인적인 기록물로서 독후감을 써보고 싶다.

십수년이 지나서 내가 채식주의자를 읽었다는 것을 잊지 않게..

또 훗날에 내가 옛날에 이것을 읽고 이런 생각이었구나 하는걸

기억하고 싶어서이다.

 

책을 아직 안보신분들이라면 본 독후감에는 소설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읽지 않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채식주의자는 총 세편의 중편소설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번째 중편 제목은 책 제목과 같은 채식주의자이다.

그리고 각각의 중편은 별개의 소설이 아니라 첫 번째 중편 채식주의자에서

등장하는 주요한 인물들이 각각 주인공이 되어 그 입장에서 본 소설이 되겠다.

 

채식주의자를 읽기 전에 작가의 또 다른 소설인 노랑무늬영원을 먼저 읽고

그 다음 채식주의자를 읽었는데 세가지 중편중 첫 번째 중편인 채식주의자까지만 읽고 사실 독서를 포기하려고 했다

 며칠동안 책을 열어보지 못했다.

'노랑무늬영원'에서의 어떤 인내와 두통이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며칠후 다시 도전해야지 하고 두 번째 중편인 몽고반점을 읽으면서부터는

무언가 조금씩 눈에 보이는 것이 생기는거 같았다.

무엇 때문인지?   도대체 왜 인지? 

이런 궁금증만 꽉 차 있는 답답한 무게감에서 하나씩 그 무게를 덜기 시작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진한 안개가 잔뜩 끼어있는 곳에서

조금씩 길의 형상이 보일 듯 조금씩 방향을 찾아갈때의

안도감? 시원함? 등을 느끼며..

그래서 노랑무늬영원채식주의자채식주의자를 읽으면서 상실되었던 흥미가

다시 상처에 새살 돋듯 생기면서 끝까지 잃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흥미의 주요한 것 중 하나는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불륜 또는 엽기로

생각할 수 있는 근친간의 섹스와 그것이 바디페인팅? 행위예술?이란 어떤 현란한

예술적 행위의 표현이랄수 있겠지만 지극히 일반적이고 대중적인 독자인 나에겐

사실 근친상간과 불륜, 엽기에 보다 초점이 맞춰지면서 크게 흥미가 유발된다.

그리고 물론 그러한 흥미를 느끼며 계속 한페이지 한페이지 넘길때마다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주인공이 채식주의를 하는 이유와 목적을 찾고자 장마철

산골짜기에 물이 흐르듯 빠른 속도로 페이지가 넘어갔다.


그러나 다시 '노랑무늬영원'의 여러 단편에서도 느꼈던 것처럼

중편의 이 책에서 중편이라서 그런지 정말 딱 그마만큼 노랑무늬영원보다 더 무겁게

다시 해소가 되지 않는 불만에 빠지고야 만다.

몽고반점에서 길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세 번째이자 마지막 중편인 나무 불꽃에서

다시 짙은 안개로 들어선 듯한 느낌이 든다.

도대체가 왜 더?

결국 채식주의자는 거식주의자가 되고 거식주의자가, 동물인 인간이 식물로,

식물은 자연 그 자체가 되려고 하는 모습을 목격하고야 만다.

 

이 책의 최고 난이도는 사실 마지막 부분에 있는 문학평론가의 해설이다.

여기에선 정말 무언가 답을 찾을 수 있을까 했는데 한페이지 한페이지가 더 어렵다.


해설을 다 읽은 후에도 결국 나는 왜 주인공이 채식 더 나아가 거식을

선택했는지 알 수가 없다.


 

아래는 책의 내용과는 직접적 관계없이 책을 읽으며 개인적으로 생각난 것들이다.

 

◈ 이 책은 나에게 석가모니상과 함께 신년 사실은 매년 계획이지만

  올해 보다 강도 높은 다이어트를 결심한 나에게 흔들림 없이 실행할 강력한

  자극을 주었다.

 

이 책을 읽으며 비슷한 느낌의 다른 문학물이 생각났다.

   그 몇가지를 적어본다.

 

▶ 영화 District9

주인공은 외계인 주거지역(마치 슬럼가같은)에 들어갔다가

어떤 정체불명의 물질에 오염된 후 서서히 외계인이 되어간다.

외계인이 되어가면서 겪는 주인공의 고통..

채식주의자에서는 적극적으로 주인공이 결과로 달려가지만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매우 강렬하게 거부한다는게 소설과 영화가 완전히 상이하지만,

그 과정에서 겪는 주인공의 고통이 비슷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

어렸을 때 고모부의 책장에 꼽혀있어서 꺼내 읽었던 책이 개똥벌레 연가이다.

아마 책의 표지에 어떤 소년이 날아가는듯한 소녀의 손을 잡고 있는

삽화가 마음에 들고 호기심이 발동하여 읽었을 것이다.

그러다 개똥벌레를 읽었던 것은 까맣게 잊은채

조금 성인이 되었을 때 한때 어느 티비 CF광고에 등장하여

"노르웨이의 숲을 읽어 보셨나요?" 란 CF문구로

나 같은 일반 대중에게도 어필됐던 '상실의 시대 (노르웨이의 숲)을 읽고 나서야

이거 어렸을 때 읽었던 뭔가와 매우 유사하다는걸 기억해내고

생각하고 생각하다 개똥벌레란 단어가 생각이 나서 검색해 보았더니

역시 개똥벌레 연가’(반딧불이)라는 소설이 '상실의 시대'(노르웨이의 숲)

모티브가 된 소설이라는걸 알았다.

말하자면 '개똥벌레 연가'는 단편소설, '상실의 시대'는 그 단편으로 만든 장편소설.

사실상 나는 당시 인기이자 유행이었던 유명한 상실의 시대’(노르웨이의 숲)

아주 어렸을 때 이미 읽어봤다는것에 어떤 뿌듯함을 느꼈고..

또 뭔가 대단한 책인줄 알았던 노르웨이의 숲이.. 실상.. 뭐지?

나에겐 별거 아니라는 느낌 ㅠㅠ 내가 또 문학에 소양과 조예가 없다보니..


어쨌든 '채식주의자'는 그 상실의 시대에 등장하는 여자주인공을 상기시킨다.

혼자 힘들어하고..

솔직히 지금도 이해를 못하고 있다.

어째서 그렇게 힘들어하다 정신병을 얻게 되고 결국은 생을 마감했는지..

그런점에서 독자입장에서 느끼는 바는 채식주의자와 동일하다.

주변에서 어떻게든 도움을 주려고 하나 결국 도움이 못되고..

정신병원에서 치유의 시간을 가져보나 치유되지 않고..

언니가 동생을 찾아 정신병원으로 가는 길..

친구가 여주를 찾아 정신병원으로 가는 길..

여러 분위기가 비슷한 느낌이다.

물론 지극히 일반적이고 대중적인 독자인 나는 당시 상실의 시대에서도

마지막 부분에서 남주가 여주와 룸메인 어떤 중년의 여성과의 섹스에서도

상당한 충격과 흥미유발을 강하게 겪었다.

이 책은 당시 어린 나에게 성적 감흥을 많이 불러 일으킨 면이 있었다.

그런면에서도 채식주의자도 공통점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채식주의자'에서는 섹스행위가 고도의 어떤 예술적 행위를 표현하려는

여러 수단과 행위중 하나이자 정점일뿐이다.

 

또 하나는

영화나 소설이 아닌 노래이다.

.. 1992년에 홍콩에서 방송하던 MTV에서 처음 듣고 또

그때 인기가 많아 자주 방송에 나오던 MusicVideo

노래가사는 정확히 모르지만,

Peter GabrielDigging in the Dirt

 

영어가 약한 나는 사실 노래의 메시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뮤직비디오 전반과 음악 자체의 느낌 전반을 놓고 보자면,

주인공은 살아있는 체 땅속으로 들어가

몸이 부패되고 몸에서 수많은 구더기들이 자라나고

곰팡이가 피는거 같고 구더기는 수많은 파리가 되어 날아가고

땅속에서 여러 뿌리가 자라나 부패되어가는 시체속으로 들어가고

결국 몸과 땅이 하나 되면서 자연 그대로가 되어가는 일련의 과정은

채식주의자에서 여주가 거식주의자가 되어가고 나무가 되어가고

자연 그자체가 되어가는걸과 일치하는 것 같다.

그러나 소설과의 차이점은 주인공은 그것을 dirt 한 것으로 보고

자신을 그 dirty한 구덩이속에서 파헤쳐져 스스로를 구하고자 한다.

인간 내면의 어떤 어두움 더러움을 파헤쳐내어 깨끗해지고

순결해지려는 노력을 한다는점에서 본 소설과는 내용이 상이하다.


영화 하나가 또 생각났다.

우리나라의 명배우 최민식씨가 악역으로 등장하여 화제가 되었던

할리우드 영화 '루시'

이런 류의 영화를 좋아하는 나는 단연 이 영화를 보았는데

공상과학으로 시작하다가 뭔가 철학적으로 내용이 마무리되어

신선한 충격을 받은바 있다.

단순한 재미의 킬링타임용 영화로 보았다가 우주와 이 세상의 시작과 끝을

생각해보게 하는 무거운 철학적 소재.

역시 이 영화에서는 주인공의 뇌가 각성되면서

인간을 초월하는 존재가 되어가는데 물론 공상영화라서 실제로 영화에서는

초월하고 있지만, 소설의 여주는 인간이기 때문에 초월하지 못한다.

다만, 이상을 찾아 가는길이 죽음으로 가는길이고 여주는 그 죽음자체를

새로운 탄생으로 받아들이는것 같다.


또 하나.. 아주 먼 옛날 티비로 봤던 영화인데

그 내용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이 가끔 순간순간

아주 태고적 원시시대의 자신으로 돌아가는 내용이 등장한다.


결국 나는 이 책 자체는 내용이 난해하여 무슨말인지 몰랐다고 했지만,

책을 읽으며 문득 생각나는 다른 영화나 소설, 음악을 통해 이 책의 내용을

나 나름대로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할수 있겠다..


그리고 또 하나.

이제 쓰고자하는 내용이야말로 이 독후감의 정수가 될것 같다.

지극히 개인적인 인생과 세계관 우주관을 말하자면,

인간은 물론 이 세상의 모든 삼라만상은 에너지로 구성되어 있고

모든 현상은 에너지의 작용이라는 생각을 해 왔다.

단순히 물리적인 현상뿐만 아니라 동물의 본능, 인간의 감성과 이성까지도

나는 점차 진화해나간 에너지의 작용으로 이해하고자 했다.

이것이 현재 팽창에너지가 작용하여 우주가 팽창하고, 우리 모두가

가장 근본적으로 팽창에너지의 기운을 받아 계속 팽창해 나가려는

속성이 있는데 언젠가 팽창의 극에 달하면 우주는 팽창이 아닌 수축의 길로 접어들때

우주에서 창조된 정확히는 우주의 팽창에너지에 의해 창조가 가장 진화된 형태의

것들(지구에서보자면 인간) 부터 빠른 속도로 사라지게 될 것이란 생각을

가끔 하곤 했다.

채식주의자의 여주는 어쩌면 팽창에너지가 아닌 수축에너지의 작용을 받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우주의 수축에너지의 작용을 받아 고요와 평온의 길을 접어들은 여주인 것이다.



아래는 이 책에서 스크랩한 2페이지이다.


나의 내면과 공감대가 형성되는 한페이지이다.

여주는 자신의 의지보다 타인(남편)의 의지에 어쩔수 없이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

불만이 있어도 혹은 자기의 의지가 있어도 그것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그냥 서로의 평화와 안녕, 원만한 관계의 유지 등을 위해

자신의 마음을 속으로 눌러놓고 타인의 의지에 따른다.

차라리 내가 그냥 조금 더 인내하고 감수하면 될 것을..

하지만 그것이 반복되고 생활이 되고 자신의 인생을 불행하게

만들어 나가는것이란걸 깨달아야 한다.

속으로 억눌려 있는 고통은 언젠가는 화산이 폭발하듯이

예상할 수 없는 형태로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

누구를 위해 사는가?  바로 나를 위해 살아야 한다.




바로 이 페이지.

채식주의자의 모든것을 함축적으로 담은 한페이지인것 같다.

위에서도 설명했지만,

평소 우주의 팽창시기에 사는 우리가 언젠가 수축의 시기가

찾아오면 일어날 수 있는 현상으로

나는 이 채식주의자를 이해하게 되었다.



독후감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순간에 영화 '아바타'가 생각났다.

그녀의 건강한 채식을 위하여.. 영화 아바타를 추천하는것으로

독후감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