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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을 자도 독립을 위해, 밥을 먹어도 독립을 위해
한반도가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나 나라를 되찾은 날을 기념하는 8·15 광복절이 있어 뜨거운 마음이 용솟음치는 8월.
우리의 마음을 치는 한국인이 있다.
"나는 밥을 먹어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잠을 자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서다.
이것은 내 목숨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면 그대는 조선의 독립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 겨레 모두가 독립을 믿으니 반드시 독립은 된다."
불보다 뜨거운 겨레사랑의 마음과 강철 같은 의지, 산처럼 움직이지 않는 믿음으로 그를 조사하던 일본 검사의 말문마저 막히게 한 한국인.
그가 바로 올곧은 사상과 정신으로 조국의 독립을 이끌었던 도산(島山) 안창호다.젊은 웅변가, 조선인의 마음을 흔들다
1878년 11월 9일. 평안남도 강서에서 태어난 안창호는 1894년, 평양에서 벌어진 청일전쟁을 목격하며 큰 충격을 받았다.
힘이 없어 일본군과 청군이 우리 땅에서 접전하는 모습을 지켜만 봐야하는 조국의 현실에 눈을 뜬 것인데, "우리가 믿고 바랄 것은 우리 스스로의 힘밖에 없다"고 여긴 안창호는 1895년 서울로 상경해 신문학을 배우며 세계관을 넓혔고, 졸업 후 독립협회에 가입해 평양에 ‘독립협회 관서지부’를 설립하기 위해 앞장섰다.
특히 1898년 평양 쾌재정(快哉停)에서 ‘만민공동회(독립협회에서 주관한 대중집회)’가 열렸을 때 스무 살, 청년의 몸으로 대중 앞에 선 안창호는 무능한 관료들을 비판한 연설로 많은 청중에게 감동을 안겨주었다.
실제로 남강 이승훈(李昇薰)도 이 날의 연설을 듣고 독립운동에 투신해 종교 지도자이자 교육자의 길을 걷게 되었는데,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진실을 오롯이 말로 표현했던 안창호는 이 후 3년간 경기·황해·평안도를 순회하며 계몽연설을 하는 데 힘을 쏟았다. 망망대해에 우뚝 선 섬이 되리라...
교육에 대한 열정도 남달랐던 안창호는 1899년, 강서군 동진면에 한국 최초로 남녀공학의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세워 육영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더 큰 일을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학문이 필요함을 절감한 안창호는 1902년 미국으로 건너갔는데, 미국으로 가는 뱃길에서 망망대해에 우뚝 솟은 하와이 섬의 웅장한 모습을 보고 자신도 그와 같은 인물이 되리라 다짐한 안창호는 호를 직접 ‘도산(島山)’! 즉, 당시 '하와이'를 일컫는 우리말로 명명하였다.
이 후 샌프란시스코에서 노동을 해 번 학비로 공부하는 한편 미주 한인들의 최초의 조직인 ‘샌프란시스코 한인친목회’를 결성해 한인들에게 일거리를 주선하고 정당한 임금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준 도산은 1905년 조국이 을사조약으로 국권을 상실하자 이듬해 귀국, 항일비밀 결사단체인 신민회(新民會)를 창립했다.務實力行으로 비춘 독립의 길
이와 함께 평양 대성학교와 태극서관, 마산동 도자기회사 등을 설립해 교육 및 산업진흥운동을 전개하고 가옥 개량과 모범농장 건설, 여성교육의 필요성 제창, 국가(國歌) 보급운동 등 다양한 국민운동을 통해 국권회복을 위해 노력했는데, 반면 한국이 처한 정세는 불리해져만 갔다.
이 와중에 1909년, 하얼빈에서 안중근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자 안 의사의 행적을 추적하던 일제는 도산을 배후 혐의로 체포했고 그는 3개월 동안 온갖 곤욕을 치렀다.
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 국내에서는 국권회복운동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신민회는 국외에 독립군기지를 개척해 일제에 항쟁한다는 전략을 세웠고, 이를 위해 미국으로 망명한 도산은 1913년, 민족자주독립을 위한 일꾼을 양성하는 흥사단(興士團)을 조직했다.
또한 1919년에는 3.1 운동 소식을 전 세계에 알리는 외교활동을 전개했는데 이후 중국 상하이로 가서 임시 정부 조직 구성에 참여한 도산은 내무총장ㆍ국무총리 서리ㆍ노동총장 등을 역임하며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특히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
죽더라도 거짓이 없으라.”, 즉 어려운 환경과 어려움에 처해도 참되게 실행하면 꼭 결실을 맺는다는 ‘무실역행(務實力行)’의 정신이 힘의 원천이라 여긴 도산은 《민족개조론(民族改造論)》을 기본으로 한 국민운동을 전개했는데,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본격적인 반일 투쟁을 위해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하다 이듬해 체포돼 두 차례의 옥고를 치른 도산은 해방을 보지 못하고 1938년 3월 10일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무실역행’을 뿌리로 하는 도산의 정신은 오늘날까지 영향을 주며 참되고, 바르게 살아가는 민족의 길을 제시하고 있으니 참으로 도산은 꺼지지 않는 독립의 빛이라 하겠다.
출처: KBS WORLD
도산 안창호 선생님 명언 모음
나는 밥을 먹어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잠을 자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해왔다.
이것은 내 목숨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
안창호
진실은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
안창호
낙망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
안창호
아름다운 이성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 얼굴을 보고 싶거든 정면으로 당당하게 보고
옆에서 엿보지 마라.
안창호
성격이 모두 나와 같아지기를 바라지 말라.
매끈한 돌이나 거친돌이나 다 제각기 쓸모가 있는 법이다.
남의 성격이 내 성격과 같아지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안창호
흔히 사람들은 기회를 기다리고 있지만 기회는 기다리는
사람에게 잡히지 않는 법이다.
우리는 기회를 기다리는 사람이 되기 전에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실력을 갖춰야 한다.
일에 더 열중하는 사람이 되어야한다.
안창호
나는 일본의 실력을 잘 안다.
지금 아시아에서 가장 강한 무력을 가진 나라다.
나는 일본이 무력 만한 도덕력을 겸하여 갖기를 동양인의
명예를 위해서 원한다.
나는 진정으로 일본 이 망하기를 원치 않고
좋은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이웃인 대한을 유린하는 것은 결코 일본의 이익이 아니 될 것이다.
원한 품은 2천만을 억지로 국민 중에 포함시키는 것보다
우 정 있는 2천만을 이웃 국민으로 두는 것이 일본의 득일 것이다.
내가 대한의 독립을 주장하는 것은 동양의 평화와 일본의
복리까지도 위하는 것이다.
안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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