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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고통은 이길 수 있으나
나라를 잃어버린 고통만은
견딜수가 없다
“만국이 평화를 주장하는 금일을 당하야 (…) 우리도 비록 규중에 생활하여
지식이 몽매하고 신체가 연약한 아녀자 무리나 국민 됨은 일반이요 양심은 한가지라 (…)
우리는 아무 주저할 것 없으며 두려워할 것도 없도다.
살아서 독립기하에 활발한 신국민이 되어 보고 죽어서 구천지하에 이러한 여러 선생을 좇아
수괴함이 없이 즐겁게 모시는 것이 우리의 제일의무가 아닌가.
간장에서 솟는 눈물과 충곡에서 나오는 단심으로써 우리 사랑하는 대한 동포에게 엎드려 고하노니
동포! 동포여! 때는 두 번 이르지 아니하고 일은 지나면 못하나니 속히 분발할지어다.”
-3.1운동 시기 발표된 대한독립여자선언서 중에서-
유관순선생은 1902년 12월16일 충남 천안군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유중권 모친은 이소제로 열사는 5남매가운데 둘째딸이었다
선생의 부친은 일찍이 기독교 감리교에 입교한 개화 인사로서 한말 남아있는 재산을털어
향리에 흥호학교를세워 민족 교육 운동을 전개한 계몽운동자였다
이를 통해 민족의 실력을 양성함으로써 국권회복의 목적을 달성하려 했던 민족주의자이기도하였다
열사는 이러한 부친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감리교에 입교하여 돈독한 신앙심을키우는한편
부친의 훈도아래 민족의식을 함양하여갔다
특히 열사는 1910년대 일제의 가혹한 무단정치를 몸소 체험하면서 민족의 처지를 인식하게되었다
열사의 생각은 종교적 양심과 민족적 양심에서 발로된것이었고 양자가 서로 응축된것이었기때문에
어떠한 시련과 탄압도 이겨낼 신념이 굳건하게 자리잡아가고있었다
그러던 중 공주에왔던 감리교 순회 선교사의 주선으로 1915년봄 이화학당의 보통과에 편입하게되었다
이화학당에서의 생활은 매우 행복한 나날이였다
그것은 프라이 교장의 보살핌 속에 선진학문을 공부할수있었고
또 먼저 입학한 사촌언니의주선으로 금세 선후배학생들과 친해질수있었기때문이였다
행복한 학교생활속에서도 선생은 조국과 민족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을 잃지않았다
선생은
"난 잔다르크처럼 나라를 구하는 소녀가 될테다누구나
노력하면 될수있지않을까 그리고 나이팅게일처럼 천사와같은 마음씨도가져야지"
하고 마음속으로 시도하면서 다짐하였다고한다
선생의 이같은 조국애와 민족애는 곧 이어 봉기하여 전개된 3.1운동으로 꽃피게되었다
선생은 이화학당에 입학하여 선진학문을 수용하며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을 키워가던 시기에우리민족은
독립운동의 호기를 맞이하고있었다
그것은 제1차세게대전이 막바지에이른1918년 1월8일 연합국 측을 대표한 미국대통령 윌슨이
전후 처리 지침으로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천명하였기때문이다
민족자결주의는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권리가있으며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한국 민족이 이기회에 대동단결하여
민족독립을 요구하면 민족자결주의원칙이 우리에게도 적용될수있다는
기대감 속에서 거족적인 독립운동이 계획되었다
중국 상해에서는 신한청년당 일본동경에서는 조선유학생학우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계획이 추진되었고 국내에서도 거족적인 독립운동이 종교계와 학생들에 의해 각기 추진되었다
한국 강점 직후 일제는 한국 민족의 조직적인 독립운동 역량을 제거하기위하여
정치성을 띤 모든 사회단체를강제로 해산시켰으므로 3.1운동 초기 단계는
그나마 조직과 단체를 유지할수있었던 종교계와 학생들이 주도하게된것이다
천도교 측은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최린등을중심으로
대중화 일원화 비푝력화등 3대원칙을 수립하고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으며
같은 시기 기독교 측에서도 신한청년당의 선우혁과 옛 신민회동지인 이승훈 양전백이 모여
독립운동 방략을 협의하였다 서울의 학생들 또한
보성전문의강기덕 연희전문의 김원벽 경성의전의 한위건등 전문학교 대표들이 회합을 갖고
각 학교별로 대표를 선임하여 독립운동계획을 추진하고있었다
이처럼 각기 추진되던 독립운동 계획은 천도교 측의 연합 전선 형성 제안 즉 교단과 종파를
아울러 민족 독립이라는 대명제 아래 하나로 응집하자는 제안이 받아들여지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된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민족대표의 선정 거사일
독립선언서배포의 역할 분담 불교계의동참등 3.1운동에 대한 중요한 합의가 도출되기도했다
독자적으로 독립운동 게획을 추진하던 학생들은 조선기독청년회의 총무인 막희도로부터
천도교와 기독교가 연합하였으니 동참하라는 통지를받았다
이에 학생대표들은 2월25일 회의를 열고 연합전선에참가하여 3월1일 탑골공원에 집결하며 형편에 따라서는
학생 독자적으로 독립선언 대회를 개최할것등을결의하였다
이로써 천도교 기독교 불교 학생이 참여한 민족대연합전선이 구축되엇던것이다.
거사일자는 3월3일 광무황제(고종) 국장일과 3월2일의 일요일을 피하되
국장에 참배하기 위해 상경한 사람들을 최대한 동원하기위해 3월1일로 결정하였다
모든 준비를마친 민족대표들은2월28일밤 손병희의 집에서 최종모임을가졌다
이자리에서 민족대표들은 동일한 행동을 취하고 일제에 체포되더라도
그동안의 결과를 정정당당히 밝힐것등을 결의하였다
1919년 3월1일 오후2시 사정상 불참한 4인을 제외하고 태화관에 집결한 29인의 민족대표들은
역사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독립선언식은민족대표들이 이종일이 가지고 온 독립선언서를 돌려보고
한용운의 연설에 이어 만세삼창을하는것으로 간단히끝났다
하지만 탑골공원에서는 수천명의 학생과 시민이모여 있다가 2시30분경 독자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곧 시가지로 물밀듯 밀려나가 만세시위를 전개함으로써 3.1운동의 불꽃을 지폈다
시위대 중 일부는 덕수궁으로 들어가 광무황제의 영전에 조례를 올리기도하였고
프랑스 영사관에 들어가 한국인의 독립의사를 본국에 통고해 줄것을 요구하기도 하였으며
미국 영사관앞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혈서를 들고 시위를 벌이기도하였다
이날 서울의 만세시위는 날이 저물도록 시내도처에서 전개되었다
열사또한 이같은 3.1운동 추진계획을 이화학당 내의 비밀결사인 이문회 선배들을 통하여 감지하고있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3.1운동이 발발하기바로전날 서명학 김복운 등 6명의 고등과 1학년 학생들과
시위결사대를 조직 만세시위에 참가하기로 굳게 맹세하였다
드디어 3월1일 탑골공원을 나온 만세시위대가 학교앞을 지나자 선생은 6명의시위결사대동지들과함께
내가있는동안 너희들을 내보내 고생시킬수없다 나를밟고 넘어갈테면 가라고하는 프라이교장의만류를뿌리치고
뒷담을넘어 시위운동에 동참하여갓다
이로써 열사는 마치 잔다르크처럼 구국의 화신으로 일제하 최대의 항일
민족독립운동이자 민족혁명운동인 3.1운동의 한복판으로 뛰어들게된것이다
그리고3월5일 선생은 6명의 시위결사대동지들과 함꼐
서울에서 전개된 최대의 시위운동인 남대문역 만세시위운동에참여하였다
3.1운동 학생 대표였던 강기덕과 김원벽등이 주도한 이날의만세시위운동에는
선생을비롯한 서울지역의 학생거의 전부와 광무황제의 인산을마치고 귀향하던 인사들이 대거참여하였다
그리하여 1만여명에 이른 시위행렬은 인력거를타고 대한독립기를 앞세운 강기덕과 김원벽을따라
한갈래는 남대문시장으로 한국은행을거쳐 보신각에 다른한갈래는 남대문으로부터
대한문 앞과 을지로 입구를 거쳐 보신각에 이르렀다 그리고 보신각에서
다시 하나가되어 부르짖는 시위군중들의대한독립만세소리는
지축을 흔들며 삼천리 방방곡곡으로퍼져나가 잠재된 한국 민중의 독립욕구를 일깨워나갔다
선생 또한 이날의 만세 시위운동에 동참하여 민족독립의 열기를 분출하며 항일 독립의지를 다져가고있었다.
이같이 학생들이 3.1운동에 대거 참여하고 학교가 만세 시위운동의 계획 추진 기지가되어
가자 조선총독부는 3월10일 중등학교 이상의 학교에대한 임시 휴교령을 반포하였다
이에 학교가 문을 닫게되자 선생은 서울의 독립운동 소식을 고향에 전하고
또 거기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마음먹었다 선생은 3월13일 사촌언니와함께 독립선언서를
몰래 숨겨 귀향하며 본격적으로 고향에서의 만세 시위운동을 추진하여 갔다
우선 동내에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만세 시위운동의 필요성을 설득하였다
그리고 부친의 주선으로 가리교 동면 속회장인 조인원과이백하등 20여명의 동네 유지들과 상의하여
만세 시위운동의 구체적 방침을 세워나갔다
그리하여 4월1일(음력3월1일)아우내장날 정오에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계획추진 총본부는 용두리 지렁이골에 중앙 연락기관은 장명리와 백전리에 두기로하엿다
이밖에도 천안장을보러다니는 안성 진천 청주 연기 목천등의 각면과 촌에도 연락기관을 두고
대규모 만세 시위운동 계획을 추진하여갔다
특히 유림의대표들과 집성촌 대표들을 움직여 시위참가 인원을 확보하도록하고
거사당일에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태극기를 직접만드는등 만반의 준비를 가추었다
거사를앞둔 3월31일 선생은 지령리에서 내일의 만세시위를 약속하고 다짐하는 봉화를 올렸다
그러자선생과 연락이 닿았던 다른 여러곳에서도 봉화를 올려 호응함으로써 성공적인 거사를 기약하였다
드디어 4월1일 충남아우내장날 선생은 장터 어귀에서 밤새 만든 태극기를 나누어주면서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러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복돋아주었다
정오가되자 군중앞에서
여러분 우리에겐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놈들은
우리 나라를 강제로 합방하고
온 천지를 활보하며 우리사람들에게
가진 학대와 모욕을 다하고있습니다
우리는 10년동안 나라없는 백성으로
온갖 압제와 설움을 참고살아왓지만
이제 더는 참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나라를 찾아야합니다
지금 세게의 여러 약소민족들은
자기나라의 독립을위하여 일어서고있습니다
나라없는 백성을 어찌 백성이라하겠습니까
우리도 독립만세를 불러 나라를 찾읍시다
라고 열변을토해냈다
선생의 이러한 연설은 군중들에게 애국심을 한층 고조시켜
장터는 이들이내뿜는 독립의 열기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어 아우내 장터의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다
선생과함께 만세시위운동을 주도적으로추진하였던 조인원이 대표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함으로써 약식의 독립선언식을 가진것이다
그런다음 선생을필두로 3천여명의 군중들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기를 앞에우고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여갔다
시위 대열이 아우내 장터 곳곳을 누비자 헌병들이 달려와 총검을 휘두르며 만세 시위운동을 탄압하기시작하였다
나중에는 이들의 지원요청으로 천안 일본군과 수비대들이 도착하여
총검으로 시위운동자들을 학살함에따라 이날 19명의 사망자와 30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게되었다
이때 선생은 부친인 유중권이 왜사람을 함부로죽이느냐고 항의하였다가
일본 헌병의 총검에 찔려 순국하였고
이를 보고 남편의 원수를 갚으려고 달려들다가 선생의모친마저도 일본헌병들에게 학살당하고말았다
이에 선생은 군중들을이끌고 부친의 시신을 둘러메고 헌병주재소로쇄도하여 항의 시위를 계속하였다
숙부는 격분하여 주재소에서 두루마기의 끈을풀어 헌병의목을 졸라매려하였고
또 제지하는 헌병보조원에게 너는 보조원을 몇십년이나하겠느냐때려죽이겠다고 윽박질렀다
열사또한고야마 주재소장의 멱살을 쥐고 흔들면서
나라를 되찾으려고 정당한 일을했는데 어째서 총기를 사용하여 내 민족을 죽이느냐고
일제의만행을규탄하면서독립운동의정당성을밝혔다
김용이는 주재소의 헌병보조원들에게 조선 사람이면서 무엇때문에 왜놈의 헌병 보조원을하느냐
함께 만세를 부르라 그렇지 않으면 죽여도 시원치않을놈들이라고 호통치기도하였다
나아가 시위 군중들은 헌병들이 강탈했던태극기를 도로빼앗아 휘두르며
죽은 사람들을 어떻게할것인가우리도함께죽이라고 소리치며
구금자를 석방하라고 요구하면서 주재소를 습격할 태세를 보였다
이에 헌병들은 재차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시위군중들을 해산시킨뒤
그날 저녁 선생과 유중모 조인원 조병호 부자등 시위주동자들을 체포하여 천안헌병대로압송하였다
선생은 천안헌병대에서 갖은 고문을 받으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시위주동자라고말하면서
죄없는 다른사람들을 석방하라고 호통치기도하였다
그리고 공주감옥으로 이송될때에는 군중들이 많이모여있는곳을지날때마다
독립만세를 여닝어 고창하여 불굴의 독립의지를 표출하기도하였다
선생은 법정에서
나는 한국사람이다너희들은 우리 땅에 와서 우리 동포들을 수없이 죽이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였으니 죄를 지은 자는 바로 너희들이다.
우리들은 너희들에게 형벌을 줄 권리는 있어도 너희들은 우리를 재판할 그 어떤 권리도 명분도 없다고하면서
일재의 재판을 거부하는 당당함과 민족적기개를 잃지않았다
그러나 5월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5년을선고받게된 선생은 경성복심법원에공소하였다
공주감옥에서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된 선생은 여기에서도
아침저녁으로 독립만세를 고창함으로써 수감자들의 항일독립의지를고취하여갔다
선생은 6월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도 징역3년을받게됨에따라상고하였으나
같은해9월 기각되어형이확정되었다
이후에도 선생은 서대문감옥에서의 온갖 탄압과 고문에도 굴하지않고
지속적으로 옥중만세를불렀고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도하였다
이롱니해 선생은 지하감방에감금되어야만적이고 무자비한고문을당하게되었다
그리하여 결국 선생은 고문으로인한 장독으로 서대문감옥에서 18살 꽃다운 나이로 순국하고말았다.
* * *
봐주셔서 감사해요!
오늘 물타기만 끝나면 계속 글 올릴게요!
출처 : 뉴빵카페
글쓴이 : 허연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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